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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미스바설교

악인의 형통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말라

08년 7월 02일

본문: 시 37:1-22

당신이 부러워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누구를 부러워하느냐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누구를 부러워한다는 것은 당신이 그 사람을 닮아가려고 노력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형통한 악인을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참으로 위험한 인생입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말라

1절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한다'는 말을 조금더 정확히 표현하면 '안달한다'는 말입니다. 악한 사람들이 더 잘되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불타오르듯 더 분노로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악한자들 때문에 불평하는 것이 옳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에 악을 행하는 자들은 많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악한 자들에 대해 느긋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오늘 완전한 세상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은 심판 때가 아닙니다. 오늘은 과정일 뿐입니다.

또한 악을 행하는 자를 '시기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기한다는 것은 비교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우리는 악을 행하는 자들과 우리를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이 아무리 형통하여도 그들의 형통을 우리와 비교하지 말고 그냥 그들의 형통을 그대로 놔두십시오.

 

악인의 죄보다 더 위험한 것은 악인의 형통을 부려워하는 것입니다. 악인의 죄는 우리를 넘어뜨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면 그 사람은 넘어지게 됩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면 분명히 머지 않아 그 사람이 악인을 닮아 갈 것입니다. 넘어지게 될 것입니다. 악인의 악이 아니라 악인의 형통만을 부러워하였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악인의 형통을 보고 형통을 부러워하였다면 그 사람이 지금은 혹 악을 미워하여도 머지 않아 형통을 위하여 악을 행하게 될 것입니다.

악한 사람들도 다 형통을 위하여 악을 선택한 것입니다.

 

2절입니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악인이 풀과 같이 베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는 사람은 - 악인이 쇠잔하는 시점이 아니라 악인이 형통할 때만을 봅니다. 그것이 불신앙의 증거입니다.

악인이 그 죄가 드러나서 창피를 당하고 죄값을 치르는 것을 보십시오. 모든 죄는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악인은 더 빨리 쇠잔해집니다. 그런데 악인이 쇠잔해진 시점이 아니라 형통한 시점을 보니까 악인을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점을 잘못 잡는 것은 불신앙이요 어리석음입니다.

 

최후의 승자

10절입니다.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마지막은 행악하는 자는 망하는 것이요, 의인은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곧 최후의 승자가 누구인지를 생각해야합니다. 영화를 보십시오. 악인이 일시적으로 이겼다고 그것이 승자가 아닙니다. 마지막에 이긴 사람, 곧 최후의 승자가 진정한 승자가 아닙니까?

 

11절입니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승자는 악행을 일삼으며 살인을 일삼는 자가 아닙니다. 승자는 진리를 따라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에 하나인 온유한 사람이 승자가 될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만이 - 최후의 승자를 의미하는 땅을 차지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폭언을 하고, 폭력을 사용하며 살인하는 악행하는 사람들은 그 때는 더 강한 것 같지만 결국은 넘어질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 곧 진리를 따라 사는 의인이 진정한 승자가 될 것입니다. 화내는 사람은 이미 진 사람입니다. 화내지 마십시오.

 

8절에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악행하는 사람들의/ 악행에 화가 나서 분을 내고 노를 내는 것은 그것이 정당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분을 내면 결국은 자기도 '악을 만들 뿐입니다.

분노는 결켜 선을 낳을 수 없습니다. 온유한 마음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을 잃으면 이미 진 것입니다. 사랑을 잃으면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없습니다.

 

16절입니다.

“의인의 적은 소유가 악인의 풍부함보다 낫도다“

사람들은 당장 지금 누가 더 많이 가지고 있는가로 판단을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의 진정한 판단은 최후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최후의 승자가 누구인지를 압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금 적게 있는 것이 - 불의한 부자의 많이 있음보다 더 나음을 압니다. 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최후의 승자가 누구인지를 바라보며 지금 우리의 가진 것이 적어도 그것이 더 나은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십시오. 악인의 형통이 아니라 오히려 의인의 적은 소유를 부러워하십시오. 악인을 부러워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 최후 승자를 생각하며 의인을 부러워하는 현명한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