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목양
종교다원주의와 예수그리스도의 유일성
미스바
2008. 6. 26. 15:47
종교다원주의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한국은 종교다원 사회이다. 한 가족 안에 기독교인과 불교인과 유교인과 무속인이 공존한다. 초대교회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은 다원적 종교 상황 가운데 기독교가 들어왔고 그러한 상황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원자 되심을 고백하고 증거해왔다. 이러한 고백과 증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편협하고, 무식하고 맹목적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냐”고 비난받기도 한다. 과연 기독교인들은 다양한 종교와 철학들과 사상들에 대해서 무식해서, 이러한 것들이 얼마나 심오하고 고상한지 잘 모르기 때문에 이처럼 잘못된 확신을 맹목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인가? 이러한 도전 앞에서 우리는 어떠한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원자 되심을 확신하고, 또 어떻게 우리의 할말을 준비해야 하는가?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것이 진리라면 그것은 사실에 입각한 것이어야 하고 그 사실은 마땅한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첫번째로 성령의 증거이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 (롬8:16). 기독교의 독특성 중 하나는 성령의 내주하심이다. 초대교회의 종교적 주변상황을 보면 기독교 공동체는 그 출발점으로부터 유대교 외에도 헬라철학들, 애니미즘, 혹은 샤마니즘들과 직면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 공동체가 주장하는 바 “성령의 내리심과 내주하심”은 매우 독특하고 충격적인 것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 성령의 내주하심은 오늘날도 다른 종교와 비교했을 때 매우 충격적인 약속이다.
기독교도 어떤 의미에서는 “신내림”의 종교이다. 샤마니즘의 신내림이 잡신(雜神)의 내림이라면 기독교의 신내림은 하나님의 영, 즉 성신(聖神)의 “내리심”(행8:16)이다. 샤마니즘에서 잡신은 인격적이지 않고 신사적이지 않기 때문에 임의대로 사람들에게 들락거리는데 이것이 귀신들림이다. 잡신은 어떤 사람을 자신의 종으로 삼을 때 무병을 주어서 강압하고 내림굿, 즉 잡신의 영접의식을 가지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 성신은 인격적이고 신사적이어서 우리가 인격적으로 초청하고 영접할 때에만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영과 연합하여 영원히 내주하신다. 성신이 내린 사람의 특징은 첫 번째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며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자각하게 된다 (롬8:15-16).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 성신이 내린 사람의 표징은 거룩에의 갈망이다. 잡신이 내린 사람의 첫 번째 특징은 잡다한 초자연적 영들과 관련된 행위, 즉 예언, 치병과 관련된 주술행위이다. 잡신이 내린 사람은 성화와 성숙에 관심이 없다. 기본적으로 샤마니즘은 무도덕적(amoral) 이다. 잡신이 내린 사람은 부정타는 일을 함으로써 해를 당하게 될까봐 두려워하여 여러 가지 터부(taboo)에 속박된다. 그러나 진리의 영, 성령이 내린 사람은 자유하다 (고후3:17).
두번째로 성경적 증거이다. 비록 타종교인들이나 다원주의자들은 성경에 독특한 권위를 부여하지 않겠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 기초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을 수 있다. 다원주의자들 중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이스라엘 백성이나, 천사, 통치자들을 지칭하기 위한 용어로서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국한되는 개념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는 스스로 자기 자신의 신성을 자각하지도 않았고 스스로 주장하지도 않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예수를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서신서에 나타나는 많은 구절들은 초대교회 공동체의 염원을 담은 신앙고백이지 예수 자신의 주장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사도 도마의 신앙고백인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1:28) 라는 구절 하나만으로 반박된다. 만일 이 고백이 사실이 아니라면 예수는 도마의 고백을 교정했어야 했을 것이다.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의 인격, 즉 원수를 사랑하라고 (마5:44) 말씀하시고, 마음으로 음욕을 품는 것조차 간음으로 간주하시는 (마5:27-28) 높은 도덕성을 가진 분이 그러한 잘못된 신앙고백을 교정하지 않고 넘어간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고칠 때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마9:6)과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신 것 (마12:8) 외에도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 한 예는 성경 안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세번째는 문화적 증거이다. 문화는 나침반이 북쪽을 가리키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돈 리차드슨(Don Richardson)이 말한대로 문화 안에는 구속적 유비(redemptive analogy)들이 있다. 그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이 희생제사의 보편성이다. 동물의 피를 흘리는 희생제사는 거의 모든 지역에서 나타나는 지구적인 현상이며, 또한 동시에 모든 종교권에서 관측된다. 물론 지역마다 제사에 사용되는 동물들의 종류는 다르지만 동물의 피를 흘리는 제사라는 형식 면에서는 일치한다. 희생제사 의식은 분명히 하나의 근원으로부터 나왔을 것인데 그것은 바로 아담과 노아를 통해서 내려온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은 희생제사였으며 하나님께서는 이 제사를 흠향하시고 앞으로는 사람으로 인하여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않기로 작정하셨다 (창8:20). 이는 노아가 후손에게 전수한 영적 지식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희생제사였음을 암시해주는 것이다. 피가 죄를 속하며(레17:11) 피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다는(히9:22) 지식은 너무나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희생제사 의식은 비록 세대가 거듭되고 민족들이 갈라지면서 많이 와전되었지만 그 잔류물로서 거의 모든 지역에 남아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오늘날까지도 모든 종교권에서 희생제사가 드려지지만 정령숭배,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 등 어떤 종교도 희생제사의 명확한 의미에 대해서 교리적으로 설명해주지 못하고 단지 관습적으로 희생제사를 드린다는 것이다. 오직 성경만이 희생제사의 피흘림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흘리신 대속사역을 예표하는 것임을 분명히 말해준다 (히10:1-5).
문화에서 관측되어지는 또 한가지 중요한 현상은 천신(天神) 사상과 삼위일체신 사상이 보편적으로 관측되어진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하늘님은 문자대로 천신임을 말해주고, 중국의 상제(上帝)도 ‘위’(上)에 있는 지고한 천신으로서 인격적이고 초월적인 최고신이었다. 이로쿼이족은 오케(Oke)라는 이름의 천신 개념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높이 있는 자’라는 뜻이다. 마오리족의 최고신은 이호(Iho)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이호는 ‘높이 오른, 높이 있는’이란 뜻이다. 흑인인 아크포소족은 우월루우(Uwoluwu)라는 최고신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이 이름은 ‘높이 있는 것, 천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호주 동남부의 부족들은 바이아메(Baiame)를, 동쪽 해안에 거주하는 다른 부족은 다라물룸(Daramulum)을 창조자로 믿고 있다. 이러한 천신 사상은 호주의 여러 원주민 부족들 뿐 아니라 아프리카의 여러 부족들, 인도네시아, 북극, 중앙아시아, 메소포타미아, 중근동, 남미, 북미 등 거의 모든 지역에서 나타난다. 물론 이러한 천신이 점점 태양신으로 와전되어지면서 태양신을 최고신으로 하여 다신론적 자연신을 숭배하는 정령숭배신앙(Animism)의 형태로 변질되어져갔던 것을 볼 수 있으며 정령숭배신앙은 범신론으로 발전되어 갔음을 볼 수 있다.
천신사상은 삼위일체신 사상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삼신(三神) 할머니도 삼신 사상의 잔류물인데, 고대 우리나라에는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의 삼신 사상의 있었던 것이다. 또 고대 중국에서는 황제(黃帝)를 중심으로 하는 삼신일체의 관념이 있었다고 한다. 힌두교에서도 브라마(Brahma), 비쉬누(Vishnu), 쉬바(Shiva)의 트리아드(Triad)가 있고, 불교에서 법신불(法身佛), 보신불(報身佛), 화신불(化身佛)의 삼신불(三身佛) 사상이 있다. 일본의 신화에도 아메노미나가누시노, 다가미무스비, 가미무스비라는 신이 조화삼신(造化三神)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운다. 그 외에도 마야인들이 삼위일체의 표상을 사용한 흔적들이 있다. 과테말라에서 발견된 포폴부에는 비톨(Bitol), 알롬(Alom), 쿠알롬(Qualom)이 츠콜(Tzkol)이라는 총체신의 이름 하에 삼위일체로 있다. 페루의 잉카족에는 파차카막(Pacha-Camac), 콘(Con), 위라코차(Uiracocha)가 삼위일체신으로 있다. 힌두족의 책인 니루크타(Niroukta)에는 이 세상에는 세 명의 신만이 존재하며 이 셋이 모여 하나의 유일한 창조주를 이루는데 그 총체신의 이름이 프라자파티(Prajapati)라는 언급이 있다. 칼데아인은 위대한 빛 엔소프를 등변삼각형 형태를 빌어 삼위일체신으로 나타냈다. 이집트인들은 슈, 세트, 호루스를 삼위일체신으로 생각했다.
네번째로 비교종교학적 증거이다. 세계의 중요 종교들의 창시자들과 비교해서 예수는 독특한 면을 가지고 있다. 예수는 엄격한 유일신론의 배경 하에서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초기불교에 나타나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무신론에 가깝다. 석가모니 자신은 자신을 유일신과 동일시한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을 신격화하지 말 것을 제자들에게 부탁하였다고 한다. 이슬람교에서 무하메드는 결코 자신을 알라와 동일시 할 수 없었고 유교의 공자도 자신을 천(天)과 동일시 한 적은 없었다.
예수는 인간의 문제의 궁극적 근원이 죄라고 지적하였으며, 나아가서 자신은 죄가 없으며 죄사함의 권세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다른 종교지도자들은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가 죄라는 것을 지적하지 못했으며 자신이 죄가 없으며 나아가서 죄사함의 권세가 있다고까지 주장하지 못하였다.
모든 중요한 종교의 창시자들이 다 죽었지만 예수 외에는 모두 자연사(自然死) 하였다. 그들은 모두 늙어서 죽었거나 병들어서 죽었는데 오직 예수의 죽음만이 계획된 죽음이었다. 예수의 사역은 죽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으며 예수는 자신이 이 세상에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라고 주장하였다 (마20:28). 다른 종교지도자들의 궁극적 목적이 가르침 혹은 깨달음을 베풀기 위한 것이었다면 예수의 사역은 대속물로 죽는 것에 궁극적으로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예수의 놀랍고 아름다운 많은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교훈을 베푸는 것은 그의 부수적인 사역이었다. 모든 종교 지도자들이 죽었지만 부활을 약속하고 성취한 자는 예수 외에는 없다.
앞에서 우리가 매우 간단하게 살펴보았지만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믿는 증거들은 많이 있다. 성령의 증거, 성경의 증거는 기독교인들만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문화적 증거나 비교종교적 증거들은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과 정당성을 보여준다.
다원주의자들 중에는 “하나의 산에 올라가는 여러 가지 길”이라는 비유로 종교들이 동일한 가치를 가진 것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존 힉(John Hick)이라는 사람이 대표적인 사람이다.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에 대한 다양한 각도에서의 인식이 다양한 종교들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서양철학자 칸트의 말하는 바 물자체(物自體)와 현상계(現象界)라는 관념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각각의 종교들이 동일한 산을 올라가는 다양한 길이라는 전제도 증명하기 어려운 하나의 신념에 불과한 것이다. 각 종교들은 각각 자신의 산을 올라가는 것이다. 이러한 산들이 각각 아름다운 골짜기와 경치와 휴식처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러 산들 중에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진리의 생명수가 흘러내리는 산은 오직 예수의 산 외에는 없다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