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자에 대한 각성”
본문:눅 16:19-31
주님은 말씀을 전하실 때 / 아주 평범한 이야기를 통해서 깊은 진리를 전달하는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두 사람의 인물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대단한 부자로서 온 몸을 값비싼 명품으로 감싸고 있었습니다. 밤마다 고급스러운 파티로 불야성을 이루었습니다.
그에 비해 다른 한사람은 거지로서 거지중에 상거지였습니다. 그에게 유일하게 관심을 보여준 것은 부자집의 개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개도 거지의 헌데를 핥기 위하여 온 것 뿐입니다.
그리고 이 거지는 부자집에서 흘러나오는 남은 잔밥으로 겨우 연명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한 사람은 부자로 살다 죽고/ 한 사람은 거지로 불쌍하게 살다 죽었다는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자든 거지든 / 한 순간에 삶의 모든 것을 흔드는 순간이 찾아 봅니다. . 그것은 죽음입니다.
성도 여러분1
죽음처럼 공평한 것도 없습니다. 죽음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죽음을 인식하도록 주의를 집중시키고 계십니다. 부자는 화려한 파티는 수없이 준비하면서도 죽음을 준비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그리고 준비하는 사람들은 가장 가치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죽음이 어떤 사람에게는 뼈아픈 상실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가장 위대한 선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곧 천국과 지옥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거지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 중에 있게 되었습니다.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의 문제입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혹 부자는 나쁜 사람이고 거지는 착한 사람이라는 단순논리로 이 이야기를 이해해서는 곤란합니다.
성경은 부자를 좋고 나쁘다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부자가 왜 거지를 돌보지 않았느냐라는 사회적이고 도덕적인 책임을 묻고 계신 것도 아닙니다.
주님이 이 말씀을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부에 대한 잘못된 태도에서 나온 삶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오늘 부자의 모습을 보십시오. 집 앞에서 초죽음을 방불하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자에 대해서 전혀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 매정함을 지적합니다.
어떻게 해서 인간이 이렇게 됩니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만함때문입니다.
만약 부자가 하나님이라는 존재, 죽는다는 것을,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결코 그렇게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부자는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를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한 가지가 결정적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어떻게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느냐 하며는 주님은 부자의 이름은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거지는 부자에게 없는 이름이 불리워졌습니다.
이름을 불러 준다는 것은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뜻입니다.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자에게 이름이 없다는 것은 주님 앞에서는 그냥 돈 많은 부자였을 뿐입니다.
주님께 전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부자는 세상에서 유명인이었다면 거지 나사로는 그야말로 무명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나사로 야! ““나사로”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도우신다”입니다.
나사로는 주님과의 분명한 관계 속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나사로는 우리의 본향인 천국으로 돌아간 것이고 부자는 지옥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심판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아주 명확하게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지상에서는 악인과 의인의 명확한 구분이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선명하게 이것에 대해 구분 짓습니다.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다”(26절). 지옥에는 출구가 없습니다. 죽지 않고 홀로 고통을 당합니다.
세상의 인연도 도무지 소용없습니다. 부자는 자신의 운명이 이미 결정되었음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돌이킬 수도 없다는 것, 그래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습니다.
“가로되 그러면 구하오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그의 관심은 온통 세상에 남아 있는 다섯 형제에게 쏠려 있었습니다. 그는 살아 있는동안 자신은 물론 형제들의 영혼에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습니다. 형제들이 자신의 삶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너무 늦었습니다. 도움이 되지 않는 각성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남겨진 다섯형제”로 초점을 옮기고 있습니다. 남겨진 다섯 형제는 아직도 기회가 남아 있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여전히 구원의 가능성의 문이 열려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변에 복음을 듣지 못한 우리 이웃들입니다. 우리의 가족, 친구들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각성을 촉구하고 계십니다. 부자는 만일 죽은 자 가운데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할 것이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답은 NO였습니다.
어떤 기적으로도 사람들은 예수를 믿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죽었던 자들이 내려갈 이유가 없는 것은 세상에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시간 부자가 음부에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부자의 때늦은 각성은 우리에게 깊은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구원사건은 시간 싸움입니다. 때를 놓치면 영원히 그 기회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기회는 더 이상 주어지지 않는 순간이 온다는 말입니다.
주변의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